박현숙/수필가 (중앙일보 4-14-2010)
삼라만상이 깨어나는 봄의 기운에 미국의 수도가 들썩거린다. 미국의 오랜 숙원인 건강보험개혁법안 투표가 실시됐던 지난달 22일. 일요일인 그날 국회의사당 안은 의원들의 찬반 공론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같은 시간 국회의사당 밖 DC 시내는 이민개혁을 요구하는 수많은 인파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그날 아침 DC 노스웨스트 14가와 I 스트리드 교차로에 위치한 프랭클린 공원에 갔다. 멀리서부터 이민개혁 구호가 적힌 원색의 깃대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조카가 이민개혁 행진에 참가하기 위해 시카고에서 밤새 대절 버스를 타고 오늘 아침에 이곳에 도착했다. 비슷비슷한 여학생들 사이를 찾아 다니다 마침내 한 구석에서 깃대를 들고 서 있는 조카를 발견했다. 대학생인데도 아직 소녀 티를 벗지 못한 조카가 해말갛게 웃고 있다. 몇 년 만에 만난 조카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니 반가움과 애처로움이 교차했다.
주위를 돌아보니 그 또래 학생과 젊은이들이 많이 있었다. 밤새 14시간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이민개혁 행진에 참여하려고 달려온 학생들이다. 잠시 후 여러 아시아계 단체들이 모여 맥퍼슨 공원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나도 조카 옆에서 함께 걸었다. 꽹과리와 장고가 신명을 돋우며 워싱턴 다운타운을 힘차게 울렸다. 시카고와 LA에서 온 사물놀이패였다.
줄 바깥에 서서 행진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며 함께 걷는 임원들 중에는 또 다른 조카가 있었다. 이 조카는 작년에 대학을 졸업한 사회 새내기이다. LA에서 이번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미리 도착해 꼬박 일주일이나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매일 밤 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오는 큰 조카에게 이 일을 하는 이유를 물었다. 조카의 대답은 명쾌했다. 오바마 대통령에게 선거공약의 하나인 이민개혁을 속히 이행하도록 촉구하고 국회의원들에게 이 일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아직도 잘 이해가 안 돼 고개를 갸우뚱하는 나에게 생긋이 웃으며 대답한다.
“고모, 이민개혁 요구를 정부가 한 번에 다 수락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적어도 학생들이 서류미비라는 신분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는 일은 없어져야 해요.” 수많은 서류 미비자들을 추방시키는 비용보다 포용하는 것이 오히려 미국민 세금을 줄여주는 것이라는 조카의 설명을 들으며 이민개혁에 대해 차차 이해를 더하여 갔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는 어느 가정이 생각났다. 이십여 년을 미국에 살면서 힘들게 아들을 명문대에 보내 졸업시켰는데도 서류미비자라는 이유로 온전한 직장을 구하지 못했던 일이 생각났다. 시민권을 갖고 편안하게 자란 두 조카가 이제 성숙해져서 주변의 어려운 환경에 조금씩 눈을 떠가며 옳다고 믿는 바를 용기 있게 실천하는 것을 보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이민개혁은 어느 정당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정의로운 일이기에 두 자매가 나서서 법을 바꾸자고 앞장 선 것이다.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옳지 못한 일은 고쳐나가자는 취지에서 작은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개혁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사회의 개혁이든, 어느 단체의 개혁이든, 심지어 자신을 위한 개혁도 용기 없이는 불가능하다. 잘못됐음을 인지하고도 악취를 풍기는 그 자리에 머문다면 그것은 그 개인뿐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로서도 심히 불행한 일이다. 비록 그 개혁이 단 시일 내에 이뤄지지 않더라도 조급할 필요는 없다. 씨앗을 뿌리듯 희망을 뿌리면 언젠가는 파종할 때가 온다. 그리고 그 개혁은 더 나은 미래를 볼 수 있는 자에게만 허용됨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이 봄의 기상에 태동하는 주위의 크고 작은 개혁들이 언제 가는 이뤄지기를 바란다. 어린 조카들이 보여준 용기에 힘을 얻어 나도 내 삶의 개혁을 준비해야겠다. 용기를 갖자. 개혁의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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