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연/민족학교 조직활동가 (중앙일보 3-3-2010)
18마일의 장정을 앞둔 바로 전날 밤, 나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일기예보는 며칠 전부터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릴 것이라 하고 있었고 그 많은 준비와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갈까 불안해하며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날이 밝고 서울 국제 공원에서 출발집회가 시작되어 신나는 어린이 풍물패의 장단에 맞춰 박수도 치고 사회자들의 힘있는 진행을 듣고 나니 초조했던 나도 왠지 힘이 솟는 것 같았다.
여러 커뮤니티 단체와 학생들, 연장자분 들로 이루어진 60여명의 참가자들과 함께 두 줄을 지어 신나는 음악, 힘찬 구호와 함께 올림픽 거리로 들어섰을 때야 비로서 이민개혁을 위한 우리의 긴 행진은 시작되었다.
새벽에 온 비 때문에 길거리는 한산했지만 우리는 함께 외쳤다 “Everywhere we go, people wanna know~ (어딜 가나 사람들은 알고 싶어하죠) Who we are~ (우리가 누군지) So we tell them~ (그래서 우리는 말하죠) We are the dreamers! (우리는 꿈을 향해 노력하는 사람들) The mighty, mighty dreamers! (꿈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
우리 모두의 소망이자 꿈인 포괄적 이민 개혁과 드림법안 통과를 위한 구호를 외치며 그렇게 한참을 걸은 것 같은데 1마일 밖에 걷지 않았다며 경악하며 놀라워했던 우리가 어느새 코리아타운을 지나 다운타운 빌딩숲 속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다 멀리서 연방청사가 보이기 시작하자 감회가 새로웠다. 강풍과 센 비로 인해 다들 헝클어지고 젖은 모습이었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평소 가까이 할 수 없었던 장소, 이민국 사무실이 있는 연방청사에 다가서는 눈빛들은 모두 의미심장 했다.
두 번째 집회가 시작되고 비뚤어진 이민법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계시는 이상순 할머니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들은 우리 모두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다. 너무나 까다롭고 불공평한 이민절차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이 가족들과 가슴 아픈 이별을 하고 우리가 서있는 연방청사 건물에도 체포 되어 기본적인 인권도 보호받지 못한 채 고통 받고 있는 수많은 이민자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이 나라, 내가 사는 사회가 부끄러웠다. 이민자들을 등한시하고 흉악한 살인범도 보장 받는 기본 권리를 박탈하며 시민권자인 자녀들을 두고 서류미비 부모를 추방하는 나라가 어떻게 건강한 나라일 수 있을까.
그 집회에서 우리는 Trail of Dreams 라는 이름 하에 매일 18마일씩을 플로리다에서 워싱턴 디씨까지 걷고 있는 4명의 학생 중 한명인 Gaby 의 목소리를 전화연결로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힘찬 목소리가 스피커로 흘러나오자 우리 모두 가슴 떨린 환호를 질렀다. 너무나 고맙고, 안쓰럽고, 미안하고, 존경스러운 마음이 모두 결합된 그런 환호였다. 그제서야 나는 날씨와 일정만을 걱정했던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제서야 나는 이 행진의 참된 중요성을 머리뿐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깨닫게 되었다. 4명의 작은 영웅들, 부당한 현재의 이민시스템을 참을 수가 없었던 그들… 비가오나 눈이오나 물집 잡힌 두발로 공정하고 인도적인 이민개혁 하나만을 위해 4개월 일정으로 1,500마일을 걸어가고 있는 그들. 그들과 하루나마 함께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이 사회의 변화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기회가 아닐까. 이미 몸은 지쳐오고 숨도 가빠졌지만 마음만큼은 아침보다 더욱 강건해졌다.
많은 라티노 이민자들이 주거하는 엘에이 동부 보일 하이츠 시를 지나 다시 한인타운으로 오는 길에는 잠시 햇빛이 쨍 하고 비추는 듯 하더니 또다시 비바람이 내리치기를 반복했다. 1마일 남짓 도착점을 남겨 두었을 때는 어린이 풍물패가 우리와 다시 합류 해 지쳤던 우리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고 흥이 나는 장단에 맞춰 다시 한번 힘차게 마지막 걸음을 했던 우리는 출발 후 10시간이나 지난 저녁 7시에 웨스턴과 윌셔 코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도 이민개혁이 빨리 실현되길 소망하는 촛불집회를 하였고, 간신히 움직이는 두 다리로 돌아와 모두 함께 먹었던 따뜻한 육계장의 맛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또한, 더 이상 걸음을 옮기기 어려울 정도로 발에 심하게 물집이 잡힌 참가자들, 70이 넘은 연세에도 한번도 쉬지 않으시며 묵묵히 걸어가지던 선생님, 지치지도 않는지 큰 목소리로 마이크를 잡고 구호를 외치던 친구들, 참가자의 안전을 위해 하루 종일 구급함과 필요 물품들이 든 차로 옆에서 천천히 운전한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그 힘든 길을 웃으며 함께해주었던 모든 사람들은 내 마음에 영웅들로 자리잡았다.
이제 나는 어느 때 보다 자신 있게 꿈을 꿀 것이다. 꿈만 꾸는 것이 아니라 행동할 것이다. 이민 개혁을 위해, 공정한 법을 위해,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가 있는 나라를 위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