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경험이 정체성을 만든다

1337834876_504a0a6634_o 김용호/민족학교 선거 담당
중앙일보 12-23-08

"나는 코리안이면서도 아메리칸이에요"라고 그 청소년은 설명했다. 그가 들고 있는 그림에는 한 아이가 미국과 한국의 국기를 양 손에 각 각 들고 흔드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청소년 프로그램 졸업식에 참가 한 부모와 동료 청소년들은 박수를 보낸다. 이러한 광경은 한인 2세들을 대상으로 한 리더십 교육 프로그램이 늘어나면서 한인타운에서 자주 볼 수 있게 되었다.

한인들은 정체성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중앙일보와 USC아태리더십센터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설문 참가자 중 63%가 스스로를 코리안 아메리칸으로 정의하고 25%가 한국인, 12%가 미국인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나타나는 경향은 정체성을 "한국인", "미국인", 그리고 그 두 가지를 합친 "한국계 미국인"의 좁은 카테고리로 정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에서는 스스로를 "한국인"으로 정의하거나 한국을 포함하는 정체성을 표방하는 젊은이들에게 격려를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러한 접근 방법은 현실을 반영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경직된 세계관을 2세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역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차원의 정체성이 존재한다. 개인 차원의 정체성에 시작해서 부모, 자녀, 동생 등의 가족 내부의 정체성, 여성, 남성 등의 정체성, 노동자, 고용주, 소수민족, 이민자, 한인, 아시안인, 백인 등 각자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자신이 하는 작업, 타인들과의 관계에 따라 스스로에 대한 위치 또는 정체성을 인식하고 있고, 그 정체성에 따라 자신의 입장 및 이해관계를 정한다. 이렇게 정체성이 형성 되는데, 중요한 것은 본인의 상황이 결정 된 후 그에 따라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이지, 본인의 정체성이 결정 된 후 그에 맞게 상황이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자가 스스로를 고용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해서 노동자가 갑자기 고용주의 역할로 변하지는 않는다. 이민자는 본인이 이민자의 상황, 예를 들어 다른 나라에서 이민 온 처지라던지 영어를 잘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이민자로 인식하는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경험 할 수 있는 것에는 다양한 종류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정체성도 계속 분화 될 수 있다. 노동자도 저소득과 고소득자가 서로를 같은 부류라고 여길 여지는 적으며, 한 나라에도 지역적 정체성이 있고 그 속에서도 도시나 카운티별로, 그 속에서도 동네 별로 나뉘어진다. 한민족이라는 정체성도 자세히 보면 지역별로 이해관계가 나뉜다. 2002년 한일월드컵 같은 총체적 경험을 통해 한민족이 세대를 넘어 하나로 묶였다는데, 과연 그럴까? 94년, 98년 등의 월드컵에서 백인 심판들이 한국 팀에게 내린 편파적일 수도 있는 결정 내용과 한국 축구 팀이 아슬아슬하게 본선 진출에 실패하는 것을 기존에 목격 한 사람에게는 2002년 월드컵이 감정의 해방구이며 비슷한 경험을 한 다른 이들과 큰 공감을 느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 경험이 없는 어린이들에게 월드컵 응원은 그냥 노는 자리일 뿐인다. 또한 미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차별 받거나 무시 당하며 살아온 한인 이민자들에게 월드컵에서 한국이 유럽 팀들을 이기는 것은 다른 형태의 경험을 가져다 준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것을 보았는데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감동을 받은 것이다.

다시 한인의 정체성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한인 1세들과 2세들 사이에서 가장 이해 관계가 엇갈리는 부분은 어디일까? 바로 언어일 것이다. 전형적인 경우는 부모가 자녀에게 한국어 사용을 요구하고, 자녀들은 이를 만족시킬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거나 필요를 느끼지 못해 거부하는 경우이다. 그러면 부모는 "한국인"이니까 한국어를 해야 한다며 당위성 차원에서 설득을 하고, 자녀는 본인과 멀리 있는 한국과는 관계가 없다며 반론을 편다. 한국과 미국 정체성의 흑백논리는 보통 여기서 시작 된다. 사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모는 자녀의 정체성에 대해 잘못 판단 한 것이다. 자녀의 판단도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는 부모의 논리에 대한 반발에 불과하다.

미국에서 태어나 2세로 살아가는 한인 젊은이의 입장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는 본인과 실질적인 관계가 없다. 일상에서 이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사는 곳이 비교적 한인 밀집 지역이기 때문에 한인 2세 친구들이 많다는 점, 부모가 이민1세로서 영어가 서투르다는 점, 그리고 소수민족으로서 미국에서 차별을 당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이들은 각각 한인 2세, 이민자 자녀, 그리고 소수민족(또는 아시안)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부모가 가지고 있는 한국인이나 이민자 등의 정체성과는 다른 정체성이다. 이민자 자녀로서 영어가 서투른 부모와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한국어를 배울 동기가 될 수는 있다. 이러한 설득을 하면 말이 되기는 하지만, 자녀가 "한국인"임을 강조하며 한국어를 배우도록 강요하면 오히려 본인의 한인 2세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반감만 키울 뿐이다.

9.11 이후 일부 이민국 직원들이 시민권 신청자들과 인터뷰 하는 도중 만일 한국과 미국 사이에 전쟁이 나면 어느 쪽을 위해 싸울 것이냐는 엉뚱한 질문을 던져 세간에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일단 한국과 미국이 전쟁을 벌인다는 발상 자체가 황당하고, 한국에 친구와 가족, 미국에는 국적을 가진 사람에게 한국과 미국 사이에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것도 인간의 근본 도리를 완전히 무시한 체 국토안보부의 입맛에 맞는 답변을 강요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한인 부모들이 "한국"과 "미국" 사이에 고르도록 자녀들에게 강요하는 것 또한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아버지는 아프리카 케냐, 어머니는 미국 캔사스 주 출신의 가정 속에서 태어나 인도네시아와 하와이에서 이민 생활을 경험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으로 막을 여는 2009년에는 우리 한인들도 정체성이 정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 속의 경험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인식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