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상반기 활동 소식지

우리말| English

민족학교 설립자 고 윤한봉 선생

천지 신명이시여!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고향산천과 친구들을 생각하며 울고 있는 입양 청소년들의 눈물을 닦아주시옵소서. 그리고 할 짓 못할 짓 다하고 계시는 우리 동포 누이들의 한숨과 눈물을 없애 주시옵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선영이 있는 고향산천 나오셔서 말도 글도 안 통하여 고독하고 답답한 생활을 하고 계시는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한숨을 따사롭게 풀어 주시옵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무작정 해외로 빠져나와 불법체류자가 되어 차별과 착취를 당하며 불안과 근심 속에서 나날을 보내는 우리 동포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불어 넣어 주시옵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경제적 안정을 위해 과정하게 노동하는 동포들의 피곤을 씻어주시옵고 일에 쫓기어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부모님들의 한숨까지도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문화적 갈등과 가정문제 등으로 비뚤어져 가출한 청소년들, 그리고 잘못되어 교도소에 가있는 동포 청소년들, 비슷한 이유로 정신병동에서 고생하시는 우리 동포들이 하루속히 웃으며 가정과 동포사회로 돌아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1985년 11월 뉴욕한인문화패’비나리’ 창립공연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에서 읽은 제문 중에서.

고 윤한봉 선생은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마지막 수배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수배를 피해 도피생활을 하던 윤한봉 선생은 미국으로 밀항하여 1983년 민족학교를 설립하여 동포사회에서 뿌리교육, 민족교육과 사회 참여를 위한 초석을 마련하였고, 1984년 재미한국청년연합, 1987년 재미한겨레동포연합을 결성하여 해외동포들이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수배가 해제되어 영구 귀국한 윤한봉 선생은 5.18 기념재단 설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고, ‘민족미래연구소’를 설립하여 지병이 악화되어 2006년 말 사회활동을 중단할 때까지 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70년대 유신체제 하에서 운동에 투신했던 윤한봉 선생은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 세계 평화, 그리고 소외된 계층을 위한 일에 평생을 헌신하셨습니다. 지병인 폐기종으로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던 윤한봉 선생은 폐 이식수술을 받은지 3일 후인 2007년 6월 26일 58세를 일기로 운명하셨습니다. 유족으로는 민족학교 총무를 역임했고 한청련 회원으로 함께 활동했던 부인 신소하씨가 있습니다.

차례




민족학교 설립자 고 윤한봉 선생
의료보건권익: 가주보건리더, 이민자의 날, 가주 의료보험 제도개혁
이민자 권익: 이민자의 꿈을 실은 대륙횡단, 오렌지와 드림법안 캠페인, 공립교육을 받을 권리, 아태계 인도적 이민개혁 전국집회, 일야천화
시민참여: 시민권, 선거참여 활동(MIV)
문화: 한누리
연대: 월셔플라자호텔 노동자 연대 활동
봉사: 세금보고, 법률상담
교육: 오염생선, 크레딧, 영어교실, 여름청소년학교
Asian
Pacific Community Fund 가 가입단체에 연례기금을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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