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윤대중입니다. 저는 이민자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이고, 로스앤젤레스 민족학교에서 이민자 가족들과 함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학생일때 가족과 함께 이민을 왔기에, 이민자 가족들이 자신의 가족과 국가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해왔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저는 개인적으로 이민자 가정들이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살아가는 것을 직접 목격해 왔기에, 그 누구보다도 그 아픔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 어머니는 북한에서 태어나셨고, 12살때 가족과 함께 남한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어머님은 남한으로 내려오실때, 제 아버님을 다시는 못보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셨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60년이 지난 지금, 어머님은 아버님의 생사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으십니다.
1978년 어머님의 형제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자, 어머님은 가족과 함께 살고 싶어서 이민을 결정하셨습니다. 제 삼촌이 어머님을 미국으로 초청 했고, 어머님과 저는 10년을 기다린후에야 미국으로 올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면서, 우리 가족은 가족의 한명을 한국에 남겨야 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한국에서 영주권을 기다리는 동안, 제 형님이 22살이 되버렸고, 저희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올 수가 없게된 것입니다. 새로이 다시 영주권을 신청해서, 제 형님이 미국으로 오게 된 것은 저희가 온뒤로 4년이 지난 후였고, 그 전까지는 가족이 헤어져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형님의 생일, 그리고 추수감사절 같은 명절이 될 때마다, 우리 가족은 형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며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에서 가족들이 함께 모일 때마다, 저희 어머님은 모든 가족을 위해 기도를 해주셨고, 형님을 위해 기도를 할 때가 되면, 항상 목이 메이시고,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형님이 미국에 도착하던 날은 우리 가족에게는 정말 너무나 기쁜 날이었습니다. 다른 이민자 부모들처럼, 어머님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그리고 저희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열심히 힘들게 일을 하셨습니다. 어머님은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외삼촌에게 돈을 빌려서 시카고에 빨래방을 차리셨습니다. 어머님은 일주일 내내 일을 하셨고, 쉬는 시간이라고는 일요일 교회에 가실 때 뿐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덕택에 어머님은 두 명의 파트 타임을 고용할 수 있게 됐고, 머지않아 집도 장만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님이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하고, 일자리를 만들어 냄으로써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었으며,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를 했다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민자 단체에서 이민자 가정들과 함께 일을 하다 보니, 저는 강제추방으로 인해 고통 받는 가족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당신은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미국에 왔고, 영주권을 받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이민 변호사가 이민서류를 제출할 때 실수를 하는 바람에 갑자기 서류미비자가 됩니다. 그러는 중에 당신의 아내는 아들을 낳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당신은 15년 동안 식당에서 불철주야 일을 했습니다. 한편 당신의 아내는 아들을 키우고, 학교 도서관에서도 열심히 자원봉사자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민단속 국이 당신의 집으로 찾아와 당신의 아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아내를 체포해 갑니다.
이민구치소에서 몇 달을 보낸 후에, 당신과 아내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당신의 아들은 한국말도 못하고, 한참 민감한 10대입니다. 결국 당신은 당신의 아들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고 미국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 가슴 아픈 이야기는 제 상상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하이오 톨레도에 살았던 정씨 가족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부모들이 한국으로 추방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저 나름대로 노력을 했지만 결국, 정씨 부부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저는 제가 한국에 가서 정씨 부부를 만났을 때 자식을 보고 싶어하며, 안부를 묻는 부부의 슬픈 표정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씨 부부는, “어떻게 이렇게 가슴 아픈일이 그것도 미국 같은 나라에서 일어날수 있습니까?” 라고 눈물을 지으며 제게 물었습니다.
현재 미국 내에는 매일 1100명의 가족들이 정씨 부부처럼 가족과 생이별을 당하고, 추방을 당하고 있습니다. 수백만의 우리 이웃들이 추방의 공포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꿈꾸었던 그런 미국이 아닙니다. 또한 수백만의 이민자들이 가족들과 다시 만나기 위해, 이민비자를 기다리며 수십 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꿈꾸었던 미국이 아닙니다.
청소년 추방유예조치가 작년 6월 발표된 후, 저와 직장 동료들은 수천 명의 서류미비자 학생들이 유예조치를 받고, 노동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을 해왔습니다. 많은 서류미비 청소년들이 처음 받은 운전면허증과 노동 허가증을 들고, 제가 일하는 민족학교로 찾아왔습니다. 기쁨에 찬 모습으로 학생들은 선생님, 사회복지사, 변호사, 지역사회 조직활동가 등이 되겠다는 자신의 꿈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학생들이 추방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신의 꿈을 펼쳐나가게 된 것처럼, 이들의 부모님들 또한 추방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날이 빨리 와야 할 것입니다. 저는 서류미비 청소년과 가정들이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때, 미국의 미래가 더욱 더 밝아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국 국민 대다수가 이민자 가정을 지지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 미국의 가치라고 믿으며, 성실히 일해온 서류미비자들에게는 시민권 취득의 기회가 주어져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서류미비 청소년들은 대학 진학의 기회가 허용되고,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 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민개혁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절박감에서 이번 단식에 참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미의회는 이민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미 국민들에게 리더십을 보여주고,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해 나가야 합니다. 더 이상 이민개혁을 미루어서는 안됩니다. 미 의회는 즉각 무너진 이민제도를 고쳐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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