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6일 재미 한청련 활동가 장광선 선생(1945년 생)께서 운명하셨습니다. 이 추모의 글은 현재 나카섹 버지니아주 책임자로 있는 동포 2세 오수경씨가 쓰고 합수윤한봉재단에서 번역한 것입니다. 오수경씨는 전에 필라델피아에서 한인 청년 풍물패 소리모리, 한청련, 미교협 등의 활동을 했습니다.
고 장광선 선생님에 대한 헌사(조사)
나카섹(미교협, 워싱턴 D.C), 민족학교 (L.A), 하나센터(시카고)는 한국과 미국에서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견결한 활동을 펼치셨던 장광선 선생님께서 2019년 8월 16일에 운명하셨다는 슬픈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우리는 유가족 여러분들게 깊은 위로를 전합니다. 김정옥 사모님, 장혜란, 장시온 자녀분들, 장경단, 장맹단, 장광민 형제자매분들, 그리고 세 명의 손자분들께.
장 선배님, 장 선생님으로 불리셨던 장광선 선생은 1946년 전남 장흥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장 선배님께서는 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하셨습니다.
장 선배님께서 사람 중심의 운동에 헌신하신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2년에 걸친 이승만 독재 치하를 경험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승만은 1960년에 학생들이 주도하는 민중봉기에 의해 하야하였습니다. 새로운 헌법이 공표되고 선거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1961년 5월에 박정희 소장은 첫 민주주의 정부를 전복하고 26년 간의 군부독재 시대로 이끌었습니다. 군부독재가 이어지던 1976년에 장 선배님은 미국 캔사스주로 이주하셨고, 후에 뉴저지에 정착하셔서 세탁소를 운영하셨습니다.
장 선배님께서는 평생동안 해외 운동의 기반을 닦기 위해 수많은 역할을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1980년대에 장 선배님께서는 5.18 진상규명위원회(1980년 5월 18일, 광주 시민들은 전두환 독재 정권의 계엄령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진행하였는데, 전두환은 1979년에 미군과 한국군을 이용한 쿠데타를 준비했었다.)와 김대중 구명위원회를 위한 미국에서의 연대의 장을 마련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김대중 씨는 훗날 1997년 남한의 대통령이 되어 남한에서 평화적 정권 이양의 첫 사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씨는 1980년대에 정치범이었습니다. 장 선배님은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동포들을 조직하여 미국의 전두환 독재 정권 지원에 항의하고 한반도 평화 정착을 호소하는 활동을 펼쳤습니다.
장 선배님은 남한의 정치적 망명자 고 윤한봉 선생을 만났습니다. 장 선배님은 해외 동포 사회에서 풀뿌리 조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시는 윤한봉 선생의 노력이 필라델피아 지역에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장 선배님께서는 회원들을 모집하고 윤한봉 선생의 정치 교육과 동포 사회 관련 활동을 지원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주셨습니다.
장 선배님께서는 동포 미래세대들이 자신들의 문화 유산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미국 사회에 참여하고 진보적인 운동에도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1994년 재미 한청련과 재미 한겨레 운동 연합이 나카섹을 설립하기로 결정했을 때, 장 선배님께서는 전략적 지도와 동포 지도자들을 발굴하기 위한 멘토 역할을 꾸준히 전개하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장 선배님께서는 불의에 맞서 싸우는 법을 가르치셨고 누구나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선배님께서는 한국의 문화 유산에 대한 자긍심을 가르치시면서도 민족주의에 함몰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는 낡은 사고 방식에 갇히지 말고 현재의 정세를 잘 관찰할 것을 주문하셨습니다. 장 선배님께서는 필라델피아에서 반전 운동이 펼쳐질 때 당신께서 하셨던 것처럼, 타민족 형제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라고 장려하였습니다. 우리는 선배님의 본보기를 통해 타민족 형제들에게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법을 배웠습니다. 선배님께서 (지금 하나센터로 알려진) 시카고 마당집 건립을 돕기 위해 주변을 조직하여 10달러 지폐들을 모은 봉투를 건네며 상부상조 정신을 우리가 배웠듯이 말입니다. 장 선배님께서는 또 다른 사람들이 운동에 대한 열정을 갖도록 키워주신 것처럼 원예 작업 능력이 뛰어나 식물 재배를 좋아하셨습니다.
장 선배님과 운동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선배님의 성찰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으신 분은 선배님의 에세이를 읽어보세요: 윤한봉 선생이 우리에게 남겨준 소명
장 선배님께서 가장 좋아하셨던 한국의 민중 가요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습니다. 이 노래는 5.18 광주 민중항쟁 직후에 만들어져 순식간에 한국 민주주의 운동의 상징곡이 되었습니다.
장 선배님!
우리는 계속 선배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겠습니다. “내가 깨어날 때, 나는 뜨겁게 외칠 것이다. 계속 전진하자. 나를 따르라!”
하늘에서 편히 쉬세요!